<한겨레> 2014. 11. 14
차브-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오언 존스 지음, 이세영·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1만7500원
대처리즘으로 산업노동자 사라지자
판매원·간병인 등 비정규직이 메워
이들을 조롱하는 차별적 언어 ‘차브’
“무능과 복지 의존” 하층민 악마화
차브(Chavs)란 말은 본디 ‘아이’를 뜻하는 집시 언어인 차비(chavi)에서 유래된 말이다. 영국에선 이것이 슈퍼마켓 계산대의 계산원이나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또는 청소부 등 “급증하는 무식쟁이 하층계급”을 뜻하는 경멸적인 언사란다. 축구선수인 데이비드 베컴이나 웨인 루니, 가수 겸 모델 셰릴 콜 같은 노동계급 출신의 유명인들도 종종 차브라는 놀림을 받는단다. 옥스퍼드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노동조합 활동가 출신 오언 존스(30)가 2011년에 발표해 영국 안팎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차브>는 중간계급 이상 영국인들이 이 차별적인 말을 구사하며 하층계급을 공격하는 행태를 ‘노동계급의 악마화’라고 했다. 그해 여러 매체에서 최고의 정치학 도서로 뽑히기도 했다는 이 책은 이 영국 노동계급 악마화의 실상과 그 주체 및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파헤치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제1장에 2007년과 그 다음해에 상류층과 하층계급 여자아이가 실종된 사건이 등장한다. 영국 언론들은 상류층 아이 실종 사건에 대해선 발생 2주 만에 유명인들의 동정과 관심을 포함한 1100여개의 기사를 쏟아냈다. 현상금도 150만, 260만파운드로 뛰었다. 정치인들은 노란 리본을 달았고 텔레비전은 사건 발생지인 포르투갈에 중계반까지 보내 현지 상황을 생중계하는 등 나라 전체가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하층민 아이 실종건에 대한 기사는 그 3분의 1에 그쳤고 아무도 리본을 달지 않았으며, 현상금도 2만5000파운드로 했다가 나중에야 5만파운드로 올렸다. 3주 뒤 하층민 아이 실종 사건이 현상금을 노린 엄마의 자작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언론이 흥분했다. 언론은 엄마가 속한 ‘복지금이나 타먹는 하층계급 찌꺼기’와 ‘인간 이하’들을 싸잡아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차브로 상징되는 영국 중상층의 하층민에 대한 ‘계급 혐오’는, 대처가 주도한 중상류의 하층민에 대한 ‘계급전쟁’이 초래한 계급간의 격심한 경제적 격차와 불평등에서 비롯됐다. 이게 <차브>의 핵심 내용이다.
지은이가 마거릿 대처의 ‘십자군전쟁’이라고도 한 대처리즘 시작 당시 영국 노동자의 절반은 노동조합에 가입돼 있었다. 그가 집권한 다음해인 1980년 13주를 끈 철강 노동자 파업, 그리고 1년간을 맞서 싸운 1985년 광부들의 총파업 등을 힘으로 무너뜨린 대처의 ‘신자유주의 혁명’ 뒤, 영국 제조업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노동당의 복지국가 정책을 “계급 증오를 조장하고 탐욕과 질투의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또다른 권력을 얻으려는” 계급전쟁이라 비판한 대처가 이른바 ‘영국병’의 치유책으로 들고나온 것은 ‘노동조합 독재’와 계급이 없는 사회였다. 그의 뜻대로 광부, 부두 노동자, 자동차 생산 노동자 등 영국 노동계급을 지탱해온 세 기둥이 무너졌고 영국 제조업도 무너졌다. 대처는 영국이 중간계급 사회가 됐다고 주장했다.
대처의 노동계급 억압은 대처와 함께 시작됐지만 대처와 함께 끝나진 않았다. “1997년 신노동당이 압승했을 때 제조업은 영국 경제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2007년 토니 블레어가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는 고작 12%에 불과했다.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700만명에 육박하던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했지만 오늘날 그 수는 250만을 조금 상회할 뿐이다.” 제조업의 몰락과 중상류 계급에 엄청난 돈을 안겨준 금융업, 신용·정보경제로의 과도한 경사에는 그 자신 “우리 모두는 중간계급”이라고 한 블레어 정권의 정책도 한몫했다. 블레어는 “새로운 영국은 실력사회”라며 “사회 같은 것은 없다. 개별적인 남자와 여자, 가족이 있을 뿐”이라고 했던 대처와 다를 바 없는 얘기를 했다.
2007년과 2008년 영국에서 각각 발생한 매들린 매캔(왼쪽)과 섀넌 매슈스 납치 사건. 중간계급 출신의 상징처럼 떠오른 매들린에 대해선 영국의 온 언론이 나섰지만 이른바 ‘차브’ 집안의 섀넌에겐 빈약한 관심만 보였다. 언론들이 내건 현상금의 차이도 극명했다. 특히 섀넌의 실종이 현상금을 노린 엄마가 꾸민 일로 밝혀진 뒤 영국 언론에서 이 사건은 하층계급 전체를 ‘악마화’하는 소재가 됐다. 각 회사 누리집 갈무리
결과는 참혹했다. 일자리가 사라지자 노동계급도 가족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바닥을 향한 경주’가 시작됐다. 산업노동자가 사라진 자리를 대형 할인마트 판매원, 콜센터 직원, 비정규직, 파트타임 노동자, 경호원, 간병인, 중소 자영업자와 같은 저임·저숙련 일자리들이 차지했다.
삶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실력, 열망(의지)이라고 정치인들은 주장했다. 언론도 거기에 가세했다. 대부분이 중간계급 출신인 국회의원들의 평균 연봉과 경비는 전체 인구 중 상위 4% 안에 들어간다. 기자들도 최상위 100명 중 절반 이상이 상층계급이 가는 사립학교 출신이다. 하층민 생활에 대한 관심도 공감능력도 없는 그들에게 가난은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계급 불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훈련 부족과 가정 파괴(부적절한 양육), 약물 남용 등 개인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였다. 그들은 영국에 더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은이가 보기에 영국은 더욱 선명하게 계급으로 나뉜 사회가 됐다. 보수당은 부자 감세가 경쟁력을 높이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며 그 결과 부가 쌓이면 그것은 낮은 곳으로 흘러넘쳐 하층민도 살찌운다는 ‘트리클 다운’ 효과를 일찍부터 주장했으나, 실제로 도래한 것은 오히려 서민층만 각종 부담을 더 많이 지고 질적 이득은 상류층이 독식하는 ‘트리클 업’이었다. 지금 영국은 상위 1%가 국가 전체 부의 23%를 차지하고, 하위 50%는 고작 6%를 차지한다. 상위 1%의 부는 주로 현금자산인 데 비해 하위 50% 부의 상당 부분은 주택담보대출이나 신용대출 같은 빚이어서 불평등은 지표보다 더 끔찍하다.
정치인과 언론이 하층민을 차브라고 모욕하고 조롱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내세우는 것은 주로 무능한 하층민이 일할 생각은 않고 여러 편법을 동원해 복지예산이나 타먹으며 나라경제를 좀먹고 있다는 것인데, 공인회계사 조사 결과를 보면 정부 예산에서 1년에 엉터리 복지금으로 나가는 돈이 10억파운드 정도인 데 비해 기업가 등 상층계급의 탈세로 빠져나가는 정부 예산은 1년에 그 70배가 많은 700억파운드나 된단다. 수입 대비 세금부담 비율도 가난뱅이들이 중간계급 부자들보다 더 높다.
결과적으로 계급을 없앤다던 대처의 신자유주의 혁명은 중상층계급이 도발한 무자비한 계급전쟁이었다. 대처와 보수당, 언론 등 중간계급이 차브라는 차별적 용어를 통해 하층민의 무능과 복지 의존을 강조하고 조롱한 것은 그 계급전쟁의 초점을 흐리기 위한, 의도된 위장전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량실업 공포와 보수당의 ‘정체성 정치’ 앞에 계급 정체성이 흔들린 노동계급 중 상당수는 노동당에서 이탈했고, 또 상당수는 기대를 접고 투표 자체를 포기함으로써 노동당은 권력을 빼앗겼다. 야당 분열까지 보수당을 도왔다. 노동계급이 직면한 대표의 위기가 오늘날 영국 정치 최대 이슈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한국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은이는 정치세력으로서 좌파의 미래는 노동계급 내부에 정치적 기반을 재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경향신문> 11월 15일
노동계급 멸시·서민증세의 영국서 한국을 본다
“우익 포퓰리즘의 부상과 대중의 정치적 소외, 비관주의와 냉담함은 영국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도”
“위기에 처한 건 노동계급의 미래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미래가 위태롭다”
▲ 차브…오언 존스 지음, 이세영·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428쪽 | 1만7500원
1980년대 영국에서 광부 노조의 격렬한 파업 투쟁이 진행될 무렵 탄광촌에서 자란 아이가 발레를 배우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을 그린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마침내 발레 무대에 데뷔하는 빌리의 힘찬 도약을 보여주며 끝난다. 영화적인 과장임을 고려하더라도 빌리의 성공은 영국 노동자 계급 자녀들의 일반적인 운명과는 거리가 멀다. 2000년대 이후 현실의 ‘빌리’들은 예술적 재능을 실현하기는커녕 영국 중산층과 언론으로부터 ‘차브’라 불리며 경멸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차브(chavs)’는 영국에서 노동계급을 가리키는 단어다. 2005년 콜린스 영어사전에 등재됐을 때만 해도 ‘캐주얼 스포츠 복장을 한 젊은 노동계급’이라는 가치중립적 단어였지만 지금은 ‘공영주택에 거주하는 폭력적인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변질됐다. 일상적인 용법에서 차브는 폭력, 게으름, 청소년 임신, 인종주의, 술주정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과 결합하며 “‘프롤레타리아’ 또는 ‘가난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인간’”이란 뜻을 지니게 됐다.
영국 노동당 연구원과 노조 활동가로 일한 영국의 신예 정치평론가 오언 존스는 <차브>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영국 중산층의 혐오를 잘 보여주는 아동 실종 사건을 소개한다. 2007년 2월 네 살 소녀 마들렌 매캔이 실종됐다. 2008년 2월에는 열 살 소녀 섀넌 매튜스가 실종됐다. 두 아동 실종 사건에 대한 영국 사회의 반응은 판이했다. 의원들이 노란 리본을 매달고 다국적 기업들까지 웹사이트에 ‘마들렌 찾기’ 광고를 올렸던 것과는 달리 섀넌의 실종에 대한 영국 사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저자는 두 가정의 계급 차이를 그 배경으로 지목한다. 마들렌의 부모는 의사로 일하는 중산층이었던 반면, 섀넌의 어머니는 5명의 남자에게서 7명의 아이를 낳은 무직자였다. 두 달 후 섀넌의 실종이 보험금을 노린 어머니의 자작극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노동계급에 대한 영국 사회의 대대적인 혐오 발언이 쏟아졌다. 한 보수당 의원은 “국가 지원에 의존해 살면서 둘 또는 셋, 또는 그 이상의 자녀를 갖는 사람들에게는 강제불임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 성향 언론들은 섀넌이 살고 있던 영국의 대표적 낙후지역인 웨스트요크셔 듀스베리를 “어떤 도덕도, 동정도, 책임감도 없으며 사랑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쓸모없는 식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묘사했다. 노동계급에 대한 혐오는 보수 성향 정치인이나 보수 언론만이 아니라 자유주의 성향의 중간계급 사람들 사이에도 퍼져 있다. BBC 1의 한 프로그램에서는 아나운서가 스타 셰프 제이미 올리버에게 “부모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공영주택에 사는 주민들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청중은 야유를 보내는 대신 박수를 쳤다. 저자는 이처럼 영국 사회에 만연한 노동계급 혐오를 “노동계급의 악마화”라고 규정한다.
‘차브’ 현상은 “노동계급을 비인간적인 언어로 매도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문화”다. 그것의 문제점은 “사회적 문제의 희생자들을 문제의 원인제공자”로 만들고 “전례없이 상승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시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저자는 문제의 진짜 원인제공자는 정치라고 보고, 정치의 책임을 추궁한다.
듀스베리는 한때 섬유산업이 번성했던 곳이다. 기계 및 제조업 분야 일자리가 넘쳤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아성이었던 영국의 다른 제조업 중심 지역과 마찬가지로 듀스베리의 산업기반은 지난 30년 동안 철저하게 붕괴했다. 그 결과 노동계급은 일자리를 잃고, 그들이 살고 있던 공영주택은 게토화했다. 빈곤은 도덕적 일탈 행위와 범죄율 증가로 이어져 ‘차브’라는 경멸적 용어에 일정한 현실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 배경에는 대처 총리와 보수당이 노동계급을 상대로 수행했던 ‘계급전쟁’이 자리 잡고 있다. 대처는 “계급은 공산주의의 개념”이라며 “사회 같은 것은 없다. 개별적인 남자와 여자, 가족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대처가 계급 간 불평등과 적대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아니다. 대처의 진짜 의도는 “사회에서 정치경제적 힘으로 존재하는 노동계급을 지워버리고 그것을 개인들, 또는 기업들의 집합으로 대체하며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 투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와 보수당은 “노동조합을 두들겨 쓰러뜨렸고, 부유층의 세금부담을 노동계급과 빈곤층에 전가했으며, 기업을 정부의 규제에서 풀어주었다”. 노동계급은 1984년 탄광파업에서 패배함으로써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쇠락했다.
당명에서 드러나듯 노동계급에 뿌리를 둔 노동당도 다르지 않았다. ‘제3의 길’을 내세우며 집권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은 노동계급을 ‘집토끼’로 여기며 중간계급의 표를 잡는 데 노력했다. 그들은 또 전통적인 ‘계급정치’를 포기하고 성소수자, 소수인종, 여성 등에 주목하는 ‘정체성의 정치’나 국제 이슈에 집중했다. 노동당에 환멸을 느낀 노동계급은 투표장에 가지 않거나 노동당 지지를 철회하고 있다. 빈틈을 차지한 건 극우 성향의 영국 국민당이다. 국민당의 조세정책은 소득세를 없애고 부가가치세를 높이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는 손해이고 부자들에게는 이익이 되는 정책이다. 그럼에도 국민당은 노동계급의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해 해법을 제시하고 지역사회에 밀착함으로써 자신들을 백인 노동계급의 수호자로 포장한다. 저자는 “우익 포퓰리즘의 부상과 대중의 정치적 소외, 비관주의와 냉담함은 영국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위기에 처한 것은 노동계급의 미래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미래가 위태롭다”고 말한다.
책은 2011년 영국에서 출간돼 그해 최고의 정치학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책 내용에서 기시감을 느낄 한국 독자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문화일보> 11월 14일
빈부격차 왜곡… ‘패자’ 를 조롱하다
2007년 영국에서 두 건의 여자 어린이 실종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마들렌이라는 아이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 실종됐고, 몇 개월 뒤 섀넌은 수영 교실에서 돌아오다 사라졌다. 딸의 장난감을 끌어안고 안전하게 돌아오길 간구하는, 방송에 비친 눈물겨운 엄마 모습도 같았다. 하지만 영국 사회의 대응법은 너무 달랐다. 마들렌 실종 2주일 후 영국 언론이 쏟아낸 기사는 1148건, 제시된 현상금은 260만 파운드(약 44억 7000만 원)였다. 언론은 물론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 작가 조앤 롤링 등 저명인사들이 현상금 기부에 참여했다. ‘마들렌을 찾아 주세요’라는 광고가 기업 웹사이트를 장식했고 의원들은 노란 리본을 달았다. 반면 섀넌에 대한 관심은 너무 미미했다. 기사량은 마들렌의 30%에 불과했고, 광고는 찾을 수 없었다. 현상금은 2만5500파운드(약 4390만 원)에 불과했다. 액수로만 보면 마들렌의 목숨값은 섀넌보다 100배나 많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마들렌은 쾌적한 레스터셔의 의사 집안 딸이었고, 섀넌은 잉글랜드 북부 가난한 듀스베리 지역에 사는 5명의 남자에게서 7명의 아이를 낳은 무직자 엄마 캐런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섀넌 사건이 현상금을 받기 위한 엄마의 자작극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캐런은 물론, 듀스베리 지역과 캐런처럼 복지수당을 받는 실직자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과 경멸이 쏟아졌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복지예산으로 놀고먹는 비도덕적 계급에 국가가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했고 이들에 대해 강제 불임을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노동당 연구원 출신의 저자는 이 두 사건의 극명한 차이가 영국 사회에서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차브(Chav)악마화’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돈을 목적으로 딸을 ‘유괴’한 엄마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층 계급의 경우, 개인의 잘못이 언제나 계층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확대되고, 왜곡된 이미지를 강화하며 결국 이들에 대한 복지정책 축소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차브. 아이라는 뜻의 ‘집시’어인 차브는 2005년 ‘콜린스 사전’에 처음 등재될 당시엔 스포츠 복장을 한 젊은 노동계급과 그들의 문화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그 뒤 의미는 공영주택에 거주하고, 복지예산을 축내면서, 일하지 않고, 하루 종일 TV 리모컨이나 돌리는 하층 계급으로 변했다. 근면한 중산층과 달리 폭력적이고, 게으르고, 성적으로 난잡하며 대책 없이 아이를 낳는 이들이다.
계급에 대한 혐오야 인류 역사에서 반복돼온 것이지만 ‘차브 악마화’는 이들이 사회 전체의 공인된 놀림감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누군가 퀴어(남자 동성애자), 파키(파키스탄인) 같은 성차별, 인종차별적 단어를 쓰면 얼굴을 찡그리거나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높이는 진보 지식인조차 ‘차브’에 대해서는 거리낌없이 공개적으로 놀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에선 ‘차브 현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매일 신문, TV, 영화, 소셜네트워크 등에 차브가 등장한다. 차브스컴(Chavscom·차브쓰레기)이라는 사이트에는 차브를 헐뜯는 캐리커처가 가득하고, 백만장자 코미디언이 차브 차림을 하고 시트콤에 나와 시청자를 웃긴다. 힐튼호텔 창업주 손자인 리처드 힐턴이 ‘차브를 걷어 차요. 차브 파이팅(Chavs Fighting)’이라는 문구를 내걸고 시작한 피트니스클럽 ‘짐박스’는 성업 중이다.
저자는 이 같은 차브는 1980∼1990년대 마거릿 대처 보수당 정부와 토니 블레어 신노동당 정권의 잘못된 정책의 결과라고 분석한다. 대처 정부가 추진한 거대한 탈산업화로 제조업이 붕괴되고 이 과정에서 노조는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 이어 신노동당은 “우리는 모두 중간계급”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누구든 노력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줬다. 이에 지역에서 존경받던 노동계급은 사라졌고, 이들이 비숙련 일자리 등으로 내려앉으면서 사회의 골칫덩이인 차브가 됐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에서 ‘1대 99’ 시위가 벌어지며 탐욕적 금융자본을 비판하고, 세습자본주의 문제를 규명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면 차브 역시 고도화된 자본주의 체제 내 빈부격차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차브가 단순한 빈부격차 문제를 넘어서는 것은 가난의 문제에 개인적 열망 부족과 게으름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이념화 작업이 한번 더 이뤄진다는 점이다. 이는 ‘중산층 vs 차브’라는 양극 구도가 굳어진 데다 반전운동·이슬람공포·여성권리·성적소수자 운동 같은 ‘정체성(Identity) 이슈’가 계급 문제를 대체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계층 이동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언론과 정계에 포진한 중산층 엘리트들은 자신과 다른 삶을 경험한 적도 없고 관심도 없다. 이에 저자는 차브 현상은 ‘패자에게 퍼붓는 승자의 조롱’이라며 새로운 노동계층의 연대, 국제적 차원의 운동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차브는 영국 사회의 문제이지만 불평등 문제,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한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함의는 크다. 경제적 빈부격차가 왜곡된 문화적 외피를 입었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라는 지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진영을 넘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2011년 당시 스물일곱 살의 젊은 운동가가 내놓은 이 책은 뉴욕타임스 ‘최고의 논픽션’, 가디언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영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동아일보> 11월 15일
[책의 향기] 英노동계급 ‘차브’는 왜 ‘혐오 食客’으로 전락했나
차브(Chav)’는 영국의 하층계급을 지칭한다. 영국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또는 영국의 중산층 이상이 생각하는 차브는 대체로 낡은 공영주택에 살며 변변한 직업 없이 정부의 복지예산을 타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직장이 있다 해도 슈퍼마켓 점원, 콜센터 직원처럼 비숙련 노동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물론 그 자녀들도 폭력적 성향을 띠고 10대에 아이를 낳는 것이 흔한 일이다. 일종의 ‘사회적 기생 집단’ ‘폭력과 일탈 집단’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차브는 피해야 할 존재이자 조롱, 무시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영국의 헬스클럽 체인 ‘짐박스’는 ‘차브 파이팅’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폭력적 성향의 ‘차브’와 길거리에 마주쳐도 주눅 들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체력과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여행사 ‘액티버티즈 어브로드’는 여행지에서 차브와 만나지 않도록 일정을 짰다는 점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았다.
이 같은 ‘차브 혐오’ ‘차브 왕따’ 현상은 대중문화에서도 반복 재생산된다. 유명 TV 드라마 ‘리틀 브리튼’에선 야비하고 뚱뚱한 싱글맘으로, 차브스컴 같은 웹사이트에선 짝퉁 브랜드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허영심 많은 캐릭터로 묘사된다.
한때 ‘캐주얼 스포츠 복장을 한 젊은 노동계급’이란 멋진 의미를 가졌던 차브가 왜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것일까.
저자는 대처(보수당)와 토니 블레어(신노동당)의 합작품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대처는 ‘영국병’을 고친다는 이유로 탄광 노조를 굴복시키고 산업의 틀을 제조업에서 금융 정보 엔터테인먼트 등 비제조업으로 바꿔 나갔다. 또 국유 기업을 민영화했다. 이 같은 제조업의 폐기는 지역사회의 일원이자 안정적 소비층이었던 노동계층의 몰락을 의미했다. 1990년대 집권한 신노동당 역시 노동자들의 편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중간계급’이란 구호로 누구나 노력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줬다. 하지만 다수 노동계급을 먹여 살릴 산업이 없어지고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상황에선 일자리를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대형 할인마트 판매원, 콜센터 직원, 간병인 등 비정규직이 대거 등장했다. 이들이 바로 차브의 원천이 됐다.
영국 정부는 차브가 복지급여를 부정으로 타내고 있다며 이에 대한 적발 의지를 강력히 내비치고 있다. 장애수당을 받는 사람은 1963년엔 50만 명이었지만 2009년 무려 260만 명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실제 노동 능력이 제한되는 장기 질환자는 17.4%에서 15.5%로 줄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장애수당을 대책 없이 퍼준 것은 바로 정부다. 장애수당 수급자는 1990년대 초반 경기 후퇴의 여파로 가파른 급증세를 보였는데 존 메이어 총리가 물러나기까지 약 80만 명이 늘었다. 이는 정부가 장애수당을 실업자 수치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또 부유층의 탈세가 차브의 복지수당 부정수급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점도 보여준다.
이 책은 사회 양극화 속에서 몰락한 노동계급의 비극을 수많은 인터뷰와 르포를 통해 보여주며 대처리즘과 신노동당의 제3의 길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올해 30세가 된 젊은 저자는 차브를 구하려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며 정부의 공공주택 건설 등이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영국의 심각한 양극화는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 저자의 해법이나 대안이 우리 실정에도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양극화에 따른 부작용이 더 커지기 전에 대처해야 한다는 시사점을 던진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한국일보> 11월 15일
"복지금 타먹는 찌꺼기..." 英 하층민 경멸 풍조 어디서 시작됐나
노동조합 활동가인 저자
하층계급 공격 행태 적나라한 고발
가난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돌린
80년대 대처리즘이 온상 주장
차브(chavs)는 영국에서 “무식쟁이 하층계급”을 뜻하는 신조어다. 영국사회에서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차브를 공격하는 법’ ‘차브를 마주치지 않는 루트가 담긴 여행상품’ 등 이들에 대한 비아냥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주류인사들은 차브를 ‘복지 식객’이라며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렇다고 차브가 불한당이거나 세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식충이는 아니다. 청소부, 슈퍼마켓 계산원, 패스트푸드 점원 등 평범한 노동자다. 그럼에도 이들은 “더러운 돼지” 취급을 받는다. 축구 선수 데이비드 베컴과 웨인 루니, 가수 셰릴 콜도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브라고 놀림 받는다. 이 단어는 2008년 옥스퍼드 사전에 정식 등재됐다.
이 믿기 힘든 현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2011년 출간 즉시 세계적 화제를 불러일으킨 ‘차브-영국식 잉여 유발 사건’이 한국어로 발간됐다. 저자는 옥스퍼드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노동조합 활동가 오언 존스(30)로 영국인들이 차별적 말을 쏟아내며 하층계급을 공격하는 행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영국 가디언, 미국 뉴욕타임스 등에서 그 해 최고의 정치학 도서로 뽑힌 이 책은 노동자 계급을 악마처럼 묘사하는 사회현상과 그 이면에 깔린 정치적 의도를 파헤친다.
저자는 두 소녀의 실종사건을 토대로 영국사회가 노동계급에 가지고 있는 인식을 드러낸다. 2007년 상류층 여자아이가 실종되자 영국 언론은 2주 만에 1,100여개의 기사를 쏟아냈다. 현상금도 260만파운드가 걸렸다. 정치인들은 노란 리본을 달았고 텔레비전은 사건 발생지인 포르투갈에서 현지 상황을 생중계하는 등 온 나라가 실종아동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 하지만 2008년 하층민 여아 실종 사건에 대한 기사는 그 3분의 1에 그쳤고 현상금도 2만5,000파운드로 책정했다. 3주 뒤 하층민 아이 실종 사건이 현상금을 노린 엄마의 자작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언론은 “그것 보라”며 “복지금이나 타먹는 하층계급 찌꺼기”라는 자극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책은 노동자에 대한 전 사회적 경멸이 대처리즘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한다. 1980년대 탈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다수 노동계급을 먹여 살렸던 제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소수가 이익을 독식하는 금융 산업이 득세했다. 그 결과 단단했던 노동계급이 사라지고 비정규 일자리(노동유연화)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정계와 언론은 “삶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ㆍ경제적 조건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의지”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나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정치인과 기자들은 노동계급에 대한 이해도가 전무함에도 가난을 사회 문제가 아닌 무책임한 출산, 의지 박약 등 개인 문제로 치환했다. 여기에 “열심히 노력하면 모두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사탕발림과 “노동계급을 없애고 모두 중산계급이 되자”는 정치구호가 맞물려 노동자 상당수가 노동당이 아닌 보수당에 투표하는 기현상까지 나타났다. 저자는 결국 노동계급 내부에 정치적 기반을 재건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놓는다.
영국 사회를 진단했음에도 매 구절이 피부에 와 닿는 책이다. 꼼꼼한 취재와 날카로운 사례 분석 등 르포르타주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는 유효하다”는 대법원 판결이나 길거리 노동자를 가리키며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자식을 타이르는 한국 사회가 영국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국민일보> 11월 14일
<손에 잡히는 책>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층계급 혐오 부추겼나
차브/오언 존스/북인더갭
[손에 잡히는 책]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층계급 혐오 부추겼나 기사의 사진
하층계급, 무지한 사람이란 뜻인 ‘차브(Chavs)’는 2005년 옥스퍼드 사전에 신조어로 등재됐다. 어린이를 의미하는 19세기 집시 언어에서 유래했는데, 하층계급을 폄하하거나 싸구려 문화를 즐기는 세대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 영국의 젊은 정치평론가 오언 존스(30)는 2011년 이 책을 통해 차브 현상을 수면 위로 띄웠다. 당시 영국에선 ‘길거리에서 만나는 차브를 공격하는 법’ ‘차브를 마주치지 않는 루트가 담긴 여행상품’ 등 이들을 향한 비아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저자는 “언론과 정치인들이 차브를 먹잇감으로 이용해 계급 혐오를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복지 예산을 축내면서 노동을 회피하고 TV 리모콘을 돌리며 소파에서 빈둥거리는 차브의 이미지를 만들어내 이들을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영국은 탈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단단했던 노동계층은 사라지고 비정규 일자리가 넘쳐나게 됐다. 다수 노동계급을 먹여 살렸던 제조업을 정리하고 소수가 이익을 독식하는 금융 산업에 전념한 결과다. 책은 가난을 동정하던 사회가 가난을 조롱하는 사회로 변해가는 현실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짚어낸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습과 비슷한 점이 여러 군데 보인다. 미국 뉴욕 타임즈의 ‘최고 논픽션’, 영국 가디언지의 ‘올해의 책’으로도 꼽혔다. 이세영·안병률 옮김.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
<서울경제> 11월 15일
차브… 누가 이들을 잉여족으로 만들었나
우리에게 '88만원 세대', '잉여인간' 등 특정한 계층을 지칭하는 신조어가 있듯, 영국에서는 2005년 옥스퍼드 사전에 '차브(Chavs)'가 새롭게 등재됐다. 무지한 사람이라는 뜻의 차브는 19세기 집시언어에서 유래한 말로, 하층계급을 폄하하거나 싸구려 문화를 즐기는 세대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젊은 정치 평론가로 영국 하층계급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불리는 '차브 현상'을 연구하던 저자는 2011년 출간한 이 책을 통해 차브를 수면 위로 띄운 동시에 계급 혐오와 불평등의 현실을 폭로했다.
그렇다면 차브는 누구인가? 대체로 더러운 공영주택에 살면서 정부의 복지예산을 축내는 소비적인 하층계급과 그들의 폭력적인 자녀들이 '차브'로 정의된다. 저자는 이를 두고 언론과 정치인들이 차브를 먹잇감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차브를 복지 정책에 빌붙어 노동을 회피하는 폭력적인 집단으로 그려 혐오주의를 불러일으킨 것. 영국의 대중문화에서도 차브를 허영심 많고 야비하면서 뒹굴거리며 TV나 보는 하층계급으로 묘사한다.
저자는 1980~90년대 영국이 대처 정부 이후 탈산업화를 시작하면서 노동계급이 흔들리고 비정규 일자리가 늘어나던 상황을 주목한다. 다수 노동계급을 먹여 살리던 제조업 등을 구조조정하고 소수가 이익을 독식하는 금융산업에 집중한 결과 '차브'가 양산됐고 이들을 위한 복지 수당을 아까워한 이들이 '차브 혐오주의'를 조장했다는 분석이다. 1만7,500원.
조상인기자 ccsi@sed.co.kr